
여행길에는 늘 예기치 못한 변수가 찾아온다. 불안과 긴장감은 이번 여행길에서도 2년 전과 비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2025년 6월. 카타르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 아침에는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고 오후 2시가 되어야 첫 차가 다닌다. 금요일 이른 아침 도착 항공권이 저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상관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나 같은 노인 여행자에게 도하에서의 하루 스탑오버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시차를 서서히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급호텔에서의 호캉스도 반에 반값으로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다구간 항공권은 직항보다 보통 30% 이상 저렴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공항 택시 마피아를 경계한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도착하면 바가지를 쓸 확률은 더 높다. 도하 공항의 도착승객에게는 공식적으로 우버 같은 공유 택시 서비스가 차단된다. 하지만 국영 ‘Karwa 택시’는 합리적인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무거운 캐리어를 직접 택시 승차장까지 옮겨주는 공항 직원들의 세심한 서비스는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Wi-Fi를 켰다. 여행 내내 나를 원격 조정하듯 챙기는 둘째 딸의 카톡 메시지가 쏟아졌다. 이스라엘의 이라크 공습, 유럽과 중동행 항공기의 회항과 우회 소식, “아빠는 지금 어디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까”라는 걱정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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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항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싼 설산은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환승 게이트에서 다시 받는 보안검색과 이름만 번지르르한 Free Wi-Fi 표시는 설산의 감동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다행히 트빌리시로 향하는 아스타나 항공의 에어버스는 의외로 깨끗했다. 심한 기류에 기체가 흔들릴 때도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조지아의 불빛은 아름다웠다.
순조롭게 착륙하나 싶던 비행기는 갑자기 다시 치솟았다. 기장의 멘트가 들려왔다. “기상 악화로 착륙이 지연됩니다. 양해 바랍니다.” 창밖에서 수차례 번쩍이던 불빛은 번개였다. 한 시간 반 넘게 트빌리시 상공을 선회하던 비행기는 결국 카자흐스탄의 악타우(Aktau)로 회항했다. 말로만 듣던 회항! 내 짧은 영어와 불안감은 기장의 상세한 설명과 ‘악타우’라는 낯선 지명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서 묵게 되는 건가?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
대부분이 조지아인과 카자흐스탄인 승객들은 놀랄 만큼 침착했다. 그들의 묵묵한 기다림은 오랜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일까. 문득 생각했다. 제주행 비행기가 김포로 회항한다면 한국 승객들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다행히 기상 상황이 나아지면서 비행기는 다시 트빌리시로 향할 수 있었다. 예정된 도착 시각은 밤 9시 30분이었지만, 실제 도착은 새벽 2시. 옆자리 카자흐스탄 커플의 도움으로 악명 높은 트빌리시 공항의 택시 마피아를 피할 수 있었고, 새벽 3시에 도착한 작은 호텔의 잘생긴 주인은 졸린 눈을 비비며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MBTI를 한때 유행하는 유사과학쯤으로 여기지만, 여행길에서의 내 모습을 보면 ‘극J’라는 진단이 맞는 듯하다. 치밀한 계획은 변수가 생길 때마다 노심초사로 바뀌고, 정신 건강에는 결코 좋지 않다. 예상 도착 시간 이후 다섯 시간 동안 소식이 끊겨있던 늙은 아빠를 걱정하던 둘째는 카톡으로 ‘아빠 유럽 여행 금지령’을 선포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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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카타르 도하
숨이 턱턱 막히는 40도 이상의 낮 기온에는 도저히 돌아 다닐 수 없었기에 밤 8시부터 시작하는 시티투어를 다녀왔다. 친절한 가이드가 당일 오전 많은 도하행 비행기가 회항하거나 우회비행으로 지연되었다고 알려줬다. 딸의 호들갑은 기우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2년 전의 여행 금지령이 옳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둘째는 당일 중동 하늘의 항공기 경로를 보여주는 그래픽을 어디선가 갈무리해 카톡에 올려놓고 금지령의 당위성을 재차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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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불안과 긴장감은 이번에도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회항이라는 돌발 상황조차도 여행의 일부라 받아들이니, 오히려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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