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th young & old 677

에피소드 21 - 블타바강의 클라이맥스, 프라하 1

지금 다시 떠올려 보면, 프라하에 도착한 순간보다도 그 이전의 공백이 더 또렷하다.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프라하까지 이어진 두 시간은 기억 속에서 통째로 빠져 있다. 플릭스버스에 올랐고, 내렸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진도, 감각도, 생각도.버스는 예정 시각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프라하에 도착했다. 중앙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울렸고, 사람들은 일제히 움직였다. 나는 그 흐름에 섞여 캐리어를 끌고 내렸다.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잠과 각성의 경계에서 자동으로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의심은 없었다. 기억이 없으면 의심도 생기지 않는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름다운 건물 안에서야 비로소 무언가 어긋났다는 것을 느꼈다. 역사(驛舍)를 잠시라도 숨 돌릴 공간으로 삼으..

여기저기/풍광 2025.12.15

에피소드 20 - 체스키크룸로프, 블타바의 첫 도시

“작은 두 샘에서 발원하여, 차가운 강과 따뜻한 강의 두 줄기가 하나로 모여 숲과 관목을 지나, 농부의 결혼식과 달빛 아래 춤추는 인어들의 원무, 그리고 바위와 폐허, 성과 궁전을 지나가는 블타바 강의 흐름을 그렸다.” 스메타나가 교향시 「블타바」를 발표하며 남긴 말이다.체스키크룸로프(Český Krumlov)는 블타바(Vltava) 강이 품은 첫 도시이자, 그 선율을 가장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강폭은 부데요비체보다 훨씬 좁고, 물길은 도시를 감싸 안듯 수차례 굽이돈다. 그 유연한 곡선 위로 고풍스러운 붉은 지붕들이 얹혀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악보 위의 음표처럼 보인다.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예보에 없던 비가 내렸다. 잿빛 하늘 아래 공기는 차가웠고, 보도 위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편의점 ..

여기저기/풍광 2025.11.07

에피소드 19 - 체스케 부데요비체, 버드와이저의 고향

이름조차 낯선 체스케 부데요비체(České Budějovice)를 여정에 넣은 이유는 단순했다. 류블랴나에서 프라하까지는 직행으로 열 시간, 환승이면 열두 시간 이상. 한 번쯤 끊어가야 했다. 처음엔 브라티슬라바였다. 수도라는 이름의 무게와 효율적인 동선이 그럴듯했다. 하지만 서울의 여행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체스키크룸로프가 바로 옆이에요.” 하루를 더 머물라는 조언까지 곁들였다. 결국 브라티슬라바 예약을 취소하고, 버스터미널 근처의 숙소를 새로 잡았다.야간버스는 늘 모순적이다. 숙박비를 아끼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만, 버스에서 깊은 잠이란 내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다행히 이번엔 운이 따랐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고, 놀랍게도 잠까지 들었다. 일곱 시간을 달려 새벽 여섯 시, 낯선 도시의 공기 속으로 ..

여기저기/풍광 2025.11.02

에피소드 18 - 슬로베니아, 시작과 끝의 단상

나를 슬로베니아라는 나라로 이끈 것은 의외로 세 명의 스포츠 스타였다. 경기 규칙조차 잘 모르고 그저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즐기며 시청하던 2020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당시 21세였던 타데이 포가차르(Tadej Pogačar)가 같은 나라의 베테랑 프리모즈 로글리치(Primož Roglič)와 최종 스테이지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그때 이 낯선 나라의 이름이 내 기억에 깊이 남았다. 그는 최근 6년간 4번의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며 나를 팬으로 만들었다. 이어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약체로 평가되던 슬로베니아 농구대표팀을 4강까지 이끈 22세의 루카 돈치치(Luka Dončić)가 등장했다. 나는 곧 그의 열혈 팬이 되었고, NBA 댈러스 매버릭스 경기를 놓치지 않게 되었다. 스포츠에 ..

여기저기/풍광 2025.10.29

에피소드 17 - 벨리카 플라니나, 바다 대신 산으로

류블랴나에서 이틀을 쉬며 당일치기 여행지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피란(Piran)이었다. 성곽 위에서 붉은 지붕의 마을과 아드리아 해를 바라보고, 베네치아 양식의 광장에서 바다 건너 베네치아를 떠올려보는 일. 여기에 포스토이나 동굴과 프레지야마 성까지 포함하면 하루가 제법 빡빡해진다. 대중교통으로는 무리이고, 투어를 이용한다 해도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게다가 높은 곳에서 붉은 지붕의 마을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며칠 전 두브로브니크에서 이미 충분히 했고, 2년 전 조지아의 시그나기에서도 느껴봤다. 물론 피란은 두브로브니크보다 차분할 것이고, 시그나기만큼 고즈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굴과 성의 입장료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쉽게 기울지 않았다.어쩌면 ..

여기저기/풍광 2025.10.27

에피소드 16 블레드 호수, 오이스트리차 언덕

블레드 호수를 ‘알프스의 눈동자’, 블레드 섬을 ‘알프스의 진주’라 부르지만, 내게는 다소 상투적으로 들렸다.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판에 박힌 수식어 때문에 진짜 얼굴이 가려질 때가 있다. 대체로 투어 상품은 인증샷(우리 때는 ‘증명사진’이라 불렀다)에 좋은 곳 위주로 짜여 있다. 그런 곳은 으레 사람으로 붐비고, 입장료도 만만치 않다. 나는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장소에 들르지 않는다. 케이블카는 양보한다 해도, 단지 언덕 하나를 오르내리는 푸니쿨라는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미각도 예민한 편이 아니라 어디를 가면 무엇을 꼭 먹어야 한다는 말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느끼며, 여행비도 아낄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믿는 자유여행의 방식이..

여기저기/풍광 2025.10.25

에피소드 15 - 보히니, 기다림도 풍경이 되는 곳

북적이는 블레드를 떠나 조용한 보히니(Bohinj)를 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 포드보그롬(Pod Voglom)은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자 숙소의 이름이기도 했다. 주변에는 작은 상점 하나 없이 숲과 호수뿐. 오히려 그 고요함이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 숙소는 지은 지 오래된 듯 다소 낡았지만, 비좁은 싱글룸은 정갈했고 직원들은 따뜻했다. 가짓수는 적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조식은 여행자의 체력을 넘어 마음까지 채워주었다. 식당 창밖으로 보이는 물안개 낀 호수와 숲은 약간의 불편함쯤은 기꺼이 감수하게 했다. 슬로베니아 최고봉 트리글라브(Triglav)를 조망하려면 보겔(Vogel) 산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전날 쌓인 피로 때문에 탑승장까지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지만 버..

여기저기/풍광 2025.10.23

에피소드 14 - 블레드, 빈트가르 협곡

슬로베니아 셋째 날, 류블랴나에서 블레드까지는 한 시간 남짓의 지역버스 여행. 블레드 성과 호수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먼저 빈트가르 협곡(Vintgar Gorge)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는 협곡 안내원이 배치되어 있었고, 셔틀버스를 타면 곧 협곡 입구에 도착했다. 노인부터 네댓 살 꼬마까지, 모두 머리에 위생비닐과 헬멧을 쓰고 분주히 준비하는 모습이 귀여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 역시 셀카를 찍고 보니 웃음이 나왔다.좁은 데크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협곡을 내려갔다. 낮게 드리운 바위 아래를 지나갈 때는 헬멧이 필수였다. 협곡 자체는 운치가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본 찬사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전날 내린 비로 물빛이 약간 흐려진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받은..

여기저기/풍광 2025.10.19

에피소드 13 - 류블랴나, 용이 지키는 사랑받는 도시

류블랴나행 밴에는 승객이 단 두 명뿐이었다. 기사와는 미리 왓츠앱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뒤, 화상통화로 서로를 확인하며 자그레브 버스터미널 약국 앞에서 스파이 영화처럼 접선했다. 밴은 터미널의 플랫폼이 아닌, 터미널 바깥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기사는 엔지니어로 일한다는 청년 승객과 종종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나는 낯선 언어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크로아티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앞으로 플리트비체 호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잠깐의 아쉬움이 스쳐갔다.국경 통과는 간단했다. 승객 둘의 여권을 차창으로 내밀자, 국경 경찰이 확인만 하고 돌려주었다. 고속도로는 한적했고, 넓은 들판 너머로는 슬로베니아의 높은 산맥이 점점 다가왔다. 도시 초입에서 처음 마주친 것은..

여기저기/풍광 2025.10.18

에피소드 12 -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해의 진주

터미널 왼쪽으로는 항구가, 정면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보였다. 버스는 천천히 스플리트를 벗어나 고갯길을 올랐다. 멀어지는 바다와 함께 '모소르'산의 능선도 점점 뒤로 밀려났다. 반쯤 졸며 오른편의 푸른 해안선을 바라보던 중, 문득 눈이 번쩍 떴다. 왼편으로 에메랄드빛 강이 흘렀고, 그 옆으로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강물은 윤슬로 반짝였고, 오렌지색 지붕들이 낮게 내려앉은 풍경은 마치 수채화 같았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마음이 먼저 반응했고 손은 따라가지 못했다. 검색창에는 ‘코민’, ‘네레트바강’이라는 이름이 남았다. 만약 이번 여행이 계획 없는 방랑이었다면, 아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 그 이름이 ..

여기저기/풍광 202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