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그레브를 떠난 완행버스는 이름 모를 소도시로 들어섰다. 거리는 묘하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외벽의 페인트가 벗겨진 채 방치된 낡은 건물들이 풍기는 우중충한 기운에서 묘한 데자뷔가 일어났다. 내가 동유럽에서 경험한 여러 도시들의 어떤 변두리 풍경에서도 이런 기시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구글맵을 열어보니 이곳은 카를로바츠(Karlovac). 이름만 웅장한 ‘카를의 도시’에서의 첫인상은, 앞으로도 한동안 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버스는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터미널에 잠시 섰다. 내리는 이는 거의 없었고, 몇몇 승객만이 새로 올랐다. 운전기사가 바뀌었고, 검표원이 건성으로 표를 확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의외였던 건 최신형 메르세데스 버스였다는 점. '완행버스 = 낡은 차량'이라는 내 고정관념이 깨졌다. 순간, 2023년 조지아 여행 때 탔던 낡은 ‘마슈르카’ 승합버스가 떠올랐다. 그러나 버스만 신형일뿐, 시스템은 지역밀착형으로 비슷했다. 버스가 한적한 시골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기사는 지역주민인듯한 승객과 환담하며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내려주고, 손을 들면 태워주는 정겨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버스는 곧 울창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숙소 주인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 무킨예(Mukinje)에서 내리라고 했다. 무킨예는 ‘고생스러운 삶의 터전’ 또는 ‘고통의 마을’을 뜻하며, 이 산골마을의 겨울이 길고 혹독하며, 석회암 산악지대라 농사도 여의치 않았기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마을은 잘 닦인 도로와 푸른 초원, 단정한 주택들과 관광 시설로 인해 더 이상 ‘고통’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알프스 소녀 하이디 시대의 스위스가 현재의 풍요로운 스위스와 비교되는 것처럼 말이다. 숙소는 무킨예 마을 건너편 언덕의 예제르체 마을에 있었다.

짐을 풀자마자 스틱 한 짝과 물병을 챙겨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있다고 했지만, 구글맵은 위험한 찻길로 안내했고 내 방향감각도 그쪽에 동의했다. 30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길이 한 시간으로 늘어났다. 마을 이름에 걸맞게, 나는 고생부터 시작한 셈이었다.
그래도 보상은 확실했다. 도착과 동시에 펼쳐진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층층이 이어지는 호수와 크고 작은 폭포들은 사진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나는 한동안 "여기가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의 촬영지"라는 소문을 진짜라고 믿었을 정도다. 알고 보니 단순히 영감을 받은 장소였지만, 오해할 만도 했다.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으니까.

국립공원 전체를 하루에 다 돌기엔 특히나 노인에겐 무리였다. 이날은 벨리키 슬라프(Veliki Slap)라 불리는 대폭포와 하층 호수군만 보기로 했다. 2만 걸음, 네 시간. 플리트비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고통과 몽환’의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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