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망은 고갈된 체력과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시차를 이겨냈다. 플리트비체에서의 첫날은 흐린 날씨조차 의식할 틈 없이, 짙은 청록빛 호수와 폭포의 세례에 흠뻑 젖어들었다. 서울의 여행감독은 에메랄드빛 호수를 기대했는지, 둘째 날만큼은 화창하길 빌어주었다. 무킨예 마을의 유일한 마트는 협소했고, 생필품과 식품 구성도 빈약했지만, 갓 구운 빵과 음료를 점심거리로 삼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때는 누군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플리트비체의 호수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친환경 전기 셔틀버스와 보트를 운행한다. 둘째 날 나는 셔틀을 타고 산 정상 부근의 스테이션 3에서 내려, 상층 호수군을 따라 잘 정비된 오솔길과 데크길을 걸으며 아래쪽 호수로 향했다. 각각의 호수에는 이름이 있지만, 굳이 기록하려 하지는 않았다. 호수는 물에 녹아 있는 광물질과 햇빛의 반사에 따라 계절과 날씨마다 색이 달라진다고 한다. 옥빛, 에메랄드빛, 청록빛—오늘은 운이 따른다면 그 세 가지 빛을 모두 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자 강렬한 햇살이 청록빛 호수를 투명한 옥빛과 에메랄드빛으로 바꾸어 놓았다. 호수의 영롱한 색과 폭포의 물소리가 뒤섞여, 마치 한 편의 교향곡처럼 들려왔다.


눈과 귀는 빛과 소리의 향연에 황홀했지만, 다리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당초 계획은 상층 호수군을 돌고 오후에는 하층 호수군을 한 번 더 걷는 것이었지만, 중간쯤에서 보트를 타고 출발지점인 스테이션 2로 돌아오기로 했다.

마을로 향하는 등산로 벤치에서 80대로 보이는 노부부가 말을 걸어왔다. 부다페스트에서 왔다니, 내 베이스캠프와 닿은 인연이 있어 더 반가웠다. 호수가 좋아 거의 매년 찾았다는 부부는 이제는 쇠약해져 호수 트레킹 대신 마을 근처 산책로를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몇 년만 젊었어도 스테이션 3까지 걸어올랐을 텐데’ 하는 내 아쉬움이 그들 앞에서 부끄러워졌다. 예전처럼 빠르고 강하지는 않더라도, 지금의 느림에 감사하며 힘닿는 대로 걷고 보는 것—그것이 시니어 여행자들이 새겨야 할 분수일 것이다.

걸음이 불편한 남편을 아내가 부축하며 천천히 마을로 향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나도 또 다른 여정을 향해 짐을 꾸렸다.
'여기저기 > 풍광'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피소드 11 - 스플리트, 황제와 강아지의 고향 (4) | 2025.10.12 |
|---|---|
| 에피소드 10 - 자다르, 황혼과 여명 (0) | 2025.10.10 |
| 에피소드 9 - 자다르, 고대와 현대의 공존 (2) | 2025.10.08 |
| 에피소드 7 - 플리트비체, 아바타의 배경 (2) | 2025.09.29 |
| 에피소드 6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전진캠프 (0) | 2025.09.26 |
| 에피소드 5 - 부다페스트, 베이스캠프 (0) | 2025.09.22 |
| 에피소드 4 - 카타르 도하, 우회마저 다행스런 (4) | 2025.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