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풍광

에피소드 9 - 자다르, 고대와 현대의 공존

Senior Magazine 2025. 10. 8. 21:30

구시가지에서 바라본 자다르 항구

숙소를 나와 무킨예 마을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외진 곳에서 차를 놓친다는 것은 하루 일정뿐 아니라 전체 여정에 차질을 줄 수 있기에 서둘러 버스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간혹 이런 치밀함이 스스로도 피곤하게 느껴지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몸이 불편한 쪽을 택하게 된다. 그래도 다시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일정표 없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나라와 편도 항공편만 정해두고 숙소와 교통은 현지에서 해결하며, 차를 놓치면 다음 차를 타고, 피곤하면 하루 더 머무는 그런 느긋한 여행 말이다. 일정에 쫓기던 여행길에서 문득 ‘계획 없는 자유’를 꿈꿨다.

정류장에는 이미 서너 명의 젊은 여행자들이 도착해 있었고, 이내 십수 명으로 늘어났다. “안녕? 어디서 왔어?”는 여행자들 사이의  단골 인사말이다. 국적도 호주, 홍콩, 스페인 등 다양했다. 미국식 억양의 활달한 호주 청년과 간단히 대화를 나누던 참에, 중년의 여성이 다가와 “안녕하세요?”라며 말을 걸어왔다. “어제 마트에서 뵈었어요. 한국분 같아 인사드리려 했는데, 계산을 마치시자마자 나가시더라고요.” 정중한 말투에 예의가 묻어났다. “아, 그러셨군요. 혼자 오셨어요?” 완행버스는 지정석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국제봉사단체에서 근무했다는 그녀는 내가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키르기스스탄에서의 근무 경험을 들려주었고, 나는 일주일간의 ‘모국어 묵언수행’을 깨며 노인 특유의 옛날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쏟아냈음이 틀림없다.

사실 나는 여행 중 한국인과의 조우를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다. 2년 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한 호텔의 셔틀택시 승강장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며 “한국사람이에요?”라며 툭 내뱉던 젊은이의 무례함에 공항까지 내내 입을 다물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말이 “Are you from Korea?”였다면, 나는 아마도 기분 좋게 “Yes”라고 답하고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같은 질문이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을까. 단지 나이 든 사람의 편협함 때문일까. 알마티 공항에서 비행이 두 시간 지연되던 그날, 나는 60대 후반의 나홀로 여성 여행객을 만났다. 여행경험이 많은 그녀는 내 아웃도어 재킷의 브랜드로 내 국적을 알아챈 듯했고,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서유럽의 도미토리에서 함께 묵었던 젊은 한국인 여행객들의 태도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무례한 말투와 행동 속에서, 자신이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고 했다. 여행지에서는 국적과 나이를 넘어 서로 덕담을 나누고, 작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교류일 텐데 말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노인들 때문에 겪었던 불이익의 기억이, 일부 젊은 세대에게 왜곡된 반감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그녀가 그날의 나처럼 ‘운이 나빴던 것’이라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비슷한 사례를 한두 번 더 접하게 되자, 단순한 '확률'이 '편향'으로 변질될 것 같은 씁쓸함이 마음 한구석을 채웠다.

버스가 자다르에 가까워지자, 해인을 따라 초목이 듬성듬성한 산맥이 드러났다. 석회암과 백운석으로 이루어진 카르스트 지형의 이 산맥은 디나르 알프스의 일부로 벨레비트 산맥이라는 것을 나중에 검색으로 알았다. 푸른 바다와 하얀 돌산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동행했던 이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구시가지 한복판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버스 차창으로 바라본 자다르 주변 풍경

장거리 버스 여행의 피로를 덜기 위해 하루 머물기로 한 도시는 기대 이상의 매력을 품고 있었다. 자다르는 고대와 중세의 유적, 그리고 현대의 생활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숙소는 로마 시대의 시민광장(Forum) 바로 옆이었고, 눈부신 태양 아래의 코발트빛 아드리아해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특히 바다 오르간(Sea Organ)이 연주하는 단조롭지만 웅장한 선율은 자연과 예술, 그리고 일상이 맞닿은 또 다른 조화의 풍경이었다. 고대의 돌과 현대의 기술이 어우러진 이 바닷가 도시에서 나는 ‘공존’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깨닫는 듯 했다.

자다르의 로마시대 시민광장(Forum)

 

파도와 협연하는 바다오르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