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로베니아 셋째 날, 류블랴나에서 블레드까지는 한 시간 남짓의 지역버스 여행.
블레드 성과 호수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먼저 빈트가르 협곡(Vintgar Gorge)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는 협곡 안내원이 배치되어 있었고, 셔틀버스를 타면 곧 협곡 입구에 도착했다. 노인부터 네댓 살 꼬마까지, 모두 머리에 위생비닐과 헬멧을 쓰고 분주히 준비하는 모습이 귀여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 역시 셀카를 찍고 보니 웃음이 나왔다.
좁은 데크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협곡을 내려갔다. 낮게 드리운 바위 아래를 지나갈 때는 헬멧이 필수였다. 협곡 자체는 운치가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본 찬사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전날 내린 비로 물빛이 약간 흐려진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받은 압도적 경험이 마음의 기준을 높였던 것 같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작은 휴게소가 나타났다. 왼쪽으로는 숲속 강길, 오른쪽으로는 산길 트레일이 이어졌다. ‘트리글라브의 왕(King of Triglav)’이라 불리는 오른쪽 코스는 관광객이 드물었고, 완만한 오르막 숲길이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전날 류블랴나에서 충전한 체력이 충분히 버텨주었다.

트레일 끝자락, '홈 언덕(Homhill)'에 올라서자 블레드 성이 눈앞에 내려다보였다. 성 뒤편으로 보이는 거대한 언덕은 마치 향유고래의 머리처럼 보였다. 협곡에서 느낀 아쉬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협곡 출발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눈 아래 블레드 성을 바라보며 언덕 아래 ‘자시프(Zasip)’ 마을을 지나 블레드까지 걷기로 했다. 오르막 숲길에서 솟구친 감정과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덕의 성 카타리나 교회를 뒤로 하고 내리막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며, 계획 없이 걷는 짜릿함을 다시 느꼈다. 마을을 지나 평평한 들판으로 접어들자, 갑작스럽게 뜨거운 햇볕이 온몸을 내리쬐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중년 부인은 “블레드까지 10분이면 됩니다”라며 웃었다. 들판 사이 도로에는 가끔 지나가는 차량뿐, 내내 나 혼자였다. 겨우 그늘을 찾아 목을 축이고 준비해온 빵으로 허기를 달랬다. 6월 말, 체감온도 38도의 뙤약볕 아래, 한 시간 반쯤 천천히 걸었다. 블레드 정류장에서 다시 만난 협곡 안내원의 묘한 웃음이 기억에 남는다. “열 명 중 한 명만 이 길을 택합니다. 봄가을에는 45분 거리지만, 한여름에는 두 배가 걸릴 수도 있죠.” 내 나이를 짐작한 듯 은근히 위로하는 말이었다. 아마 마을 부인이 알려준 10분은 차량 이동시간만을 말한 것이리라.

블레드 정류장의 좁은 벤치에서 최종 목적지인 보히니(Bohinj)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일주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시간에 쫓기고, 나는 예산과 체력에 쫓기며, 인생이 다 그렇지 않으냐며 서로 웃었다. 그들은 다음 여행지 추천을 부탁했고, 나는 자신 있게 조지아의 설산을 권했다. 먼저 출발하는 류블랴나행 버스에 오르기 전, 부부는 건강 유의하시라는 덕담과 함께 수줍게 컵라면 한 개를 내밀었다.

'여기저기 > 풍광'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피소드 17 - 벨리카 플라니나, 바다 대신 산으로 (2) | 2025.10.27 |
|---|---|
| 에피소드 16 블레드 호수, 오이스트리차 언덕 (2) | 2025.10.25 |
| 에피소드 15 - 보히니, 기다림도 풍경이 되는 곳 (2) | 2025.10.23 |
| 에피소드 13 - 류블랴나, 용이 지키는 사랑받는 도시 (0) | 2025.10.18 |
| 에피소드 12 -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해의 진주 (8) | 2025.10.13 |
| 에피소드 11 - 스플리트, 황제와 강아지의 고향 (4) | 2025.10.12 |
| 에피소드 10 - 자다르, 황혼과 여명 (0) | 2025.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