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풍광

에피소드 15 - 보히니, 기다림도 풍경이 되는 곳

Senior Magazine 2025. 10. 23. 13:48

넓고 고요한 보히니(Bohinj) 호수

북적이는 블레드를 떠나 조용한 보히니(Bohinj)를 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 포드보그롬(Pod Voglom)은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자 숙소의 이름이기도 했다. 주변에는 작은 상점 하나 없이 숲과 호수뿐. 오히려 그 고요함이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 숙소는 지은 지 오래된 듯 다소 낡았지만, 비좁은 싱글룸은 정갈했고 직원들은 따뜻했다. 가짓수는 적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조식은 여행자의 체력을 넘어 마음까지 채워주었다. 식당 창밖으로 보이는 물안개 낀 호수와 숲은 약간의 불편함쯤은 기꺼이 감수하게 했다.  

트리글라브 산과 보히니 호수

슬로베니아 최고봉 트리글라브(Triglav)를 조망하려면 보겔(Vogel) 산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전날 쌓인 피로 때문에 탑승장까지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지만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버스는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도 오지 않았다. 결국 기다림을 포기하고 차도를 따라 잘 닦인 산길로 걷기로 했다. 가끔 산악자전거를 탄 가족들이 나를 앞질러 갔을 뿐, 걷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길 중간쯤에서 뒤늦게 버스가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약이 오르기도 했지만, ‘이 길을 언제 또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30분 거리라던 산길을 풍경을 음미하며 50분 동안 천천히 걸었다.

율리안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 트리글라브

보겔 산에 조성된 목가적인 분위기의 전망대에 서자 드넓은 보히니 호수와 트리글라브를 품은 율리안 알프스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초여름이지만 1,500 미터 고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몸을 가볍게 만들었고, 눈앞의 풍경은 장엄하다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을 찾기 어려웠다. 꽤 오랜 시간 장엄함을 눈과 카메라에 담은 뒤, 산을 내려와 잔잔하게 출렁이는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보히니 호수의 서쪽

숙소로 향하려던 정류장 앞에서 갑작스러운 굉음이 공기를 찢었다. 모터바이크 두 대가 측면 충돌하며 한 운전자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몇 사람이 뛰어가 도왔고, 다행히 그는 바로 몸을 털며 일어났다. 과속인지 무모한 경쟁심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용한 호숫가에 있던 시간의 결이 순식간에 흔들렸고, 놀란 가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모토바이크 사고현장

버스는 그로부터 30분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sLOVEnia가 아니라 SLOWenia인 것 같네요.”라는 내 농담에, 서울의 버스 시스템을 경험해 봤다는 잠비아 출신 아가씨가 특히 크게 웃었다. 순간, 서로의 여행이 잠시 겹치는 소소한 동지가 되었다. 무계획 여행이었다면 며칠 더 머물렀을지도 모를 보히니. 그러나 이틀간의 시간만으로도 이곳은 내 기억 속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여행의 한 장면’으로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 풍경 속에 스며들며 흐르던 시간까지 모두 포함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