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조차 낯선 체스케 부데요비체(České Budějovice)를 여정에 넣은 이유는 단순했다. 류블랴나에서 프라하까지는 직행으로 열 시간, 환승이면 열두 시간 이상. 한 번쯤 끊어가야 했다. 처음엔 브라티슬라바였다. 수도라는 이름의 무게와 효율적인 동선이 그럴듯했다. 하지만 서울의 여행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체스키크룸로프가 바로 옆이에요.” 하루를 더 머물라는 조언까지 곁들였다. 결국 브라티슬라바 예약을 취소하고, 버스터미널 근처의 숙소를 새로 잡았다.
야간버스는 늘 모순적이다. 숙박비를 아끼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만, 버스에서 깊은 잠이란 내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다행히 이번엔 운이 따랐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고, 놀랍게도 잠까지 들었다. 일곱 시간을 달려 새벽 여섯 시, 낯선 도시의 공기 속으로 내려섰다. 첫인상은 그리 밝지 않았다. 회색빛 건물과 습한 공기, 어딘가 오래된 사회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은 대형 마켓, 스타벅스, 푸드코트, 정돈된 승강장까지 두루 갖춘, 작은 도시치곤 규모가 제법 컸고 매우 세련된 모습이었다. 숙소는 낡았지만 깨끗했다. 직원은 잠결의 얼굴로 문을 열고, 얼리 체크인에 대한 약간의 추가 비용을 받고는 카드키를 내어주었다.

한낮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블타바(Vltava)' 강변으로 걸었다. 처음의 우중충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도시는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구시가지에는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정면의 파사드(Façade)를 내세우며 커다란 분수대를 품은 넓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시장이 열리고, 축제가 펼쳐지고,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의 중심 광장과 저마다의 파사드로 꾸며진 다채로운 건물들. 나는 이런 우아한 공간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1982년 독일 트리어였음을 문득 떠올렸다. 파사드(façade)라는 말은 훗날 알게 되었지만,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공간의 기억이 이곳 부데요비체의 광장에서 불쑥 되살아났다. 여행이란 아득히 사라졌던 기억의 좌표를 다시 맞추는 일이기도 하다.

부데요비체는 중세부터 맥주의 도시였다. 이곳의 독일식 이름은 ‘부트바이스(Budweis)’, 형용사가 ‘부트바이저(Budweiser)’, 그리고 영어식 발음이 ‘버드와이저’다. 미국으로 건너간 독일계 이민자가 자신이 만든 맥주에 'Budweiser'라고 이름을 붙이며 이 도시의 전통 맥주에 경의를 표했으나, 결국 두 맥주는 긴 세월 동안 상표를 두고 다투었다. 이제 세계의 대부분은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적어도 이곳과 일부 유럽에서는 여전히 ‘Budweiser Budvar’의 전통을 인정하고 있다.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 버드와이저의 기원만큼은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것이 이 도시에 대한 작은 예의일 테니.


이 도시에서 나는 두 가지를 얻었다. 오래전 트리어의 기억을 되살린 파사드, 그리고 평생 몰다우(Moldau)라 여겼던 강을 블타바(Vltava)로 불러야 한다는 깨달음. 이름은 달랐지만, 흐름은 하나였다. 잊힌 기억도, 바뀐 여행 계획도, 결국 어느 순간 한 강물처럼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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