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77

에피소드 11 - 스플리트, 황제와 강아지의 고향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눈부신 하얀 돌빛의 도시, 달마티아 강아지와 황제가 고향을 공유하는 곳. 스플리트는 역사와 번영이 공존하는 바다의 도시였다. 역사적으로 벨레비트 산맥 남쪽의 달마티아 지역은 아드리아해 건너 로마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플리트는 지리적으로 로마와 가장 가까운 도시다. 구글맵에서 아드리아해를 가로로 늘려보면 두 도시는 위도상으로 거의 나란하다.자다르에서 버스로 두 시간 반.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답게 스플리트는 도시의 기세가 느껴졌다. 도심의 비싼 숙소를 피해 터미널에서 20분쯤 떨어진 언덕 위의 깨끗한 숙소를 이틀간 머물 곳으로 정했다. 주인은 인근 섬으로 가는 페리를 타보라며 강력히 권했다. 스플리트 앞바다의 섬들이 아름답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섬이라 하면 떠오르는..

여기저기/풍광 2025.10.12

에피소드 10 - 자다르, 황혼과 여명

아드리아해는 오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짙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해변에서 바다 오르간은 파도에 맞춰 비슷한 패턴의 소리를 내며 낮게 숨 쉬고 있었다. 단조롭지만, 그 소리는 파도와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자다르의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려다 그만 깜빡 잠이 들어, 그토록 기다리던 일몰의 순간을 놓친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아드리아 해의 황혼은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을 만했다. 다만 ‘일몰 무렵의 바다 오르간 소리가 최고’라는 말은 6월 말 성수기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수많은 인파의 소음 속에서 오르간 소리는 묻혀버렸고, 같은 건축가가 만든 ‘태양의 인사’의 원형 조명 또한 생각만큼의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후의 한산한 해변에서 들었..

여기저기/풍광 2025.10.10

에피소드 9 - 자다르, 고대와 현대의 공존

숙소를 나와 무킨예 마을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외진 곳에서 차를 놓친다는 것은 하루 일정뿐 아니라 전체 여정에 차질을 줄 수 있기에 서둘러 버스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간혹 이런 치밀함이 스스로도 피곤하게 느껴지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몸이 불편한 쪽을 택하게 된다. 그래도 다시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일정표 없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나라와 편도 항공편만 정해두고 숙소와 교통은 현지에서 해결하며, 차를 놓치면 다음 차를 타고, 피곤하면 하루 더 머무는 그런 느긋한 여행 말이다. 일정에 쫓기던 여행길에서 문득 ‘계획 없는 자유’를 꿈꿨다.정류장에는 이미 서너 명의 젊은 여행자들이 도착해 있었고, 이내 십수 명으로 늘어났다. “안녕? 어디서 왔어?”는 여행자들 사이의 단골 인사..

여기저기/풍광 2025.10.08

에피소드 8 - 플리트비체, 빛과 물의 하모니

열망은 고갈된 체력과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시차를 이겨냈다. 플리트비체에서의 첫날은 흐린 날씨조차 의식할 틈 없이, 짙은 청록빛 호수와 폭포의 세례에 흠뻑 젖어들었다. 서울의 여행감독은 에메랄드빛 호수를 기대했는지, 둘째 날만큼은 화창하길 빌어주었다. 무킨예 마을의 유일한 마트는 협소했고, 생필품과 식품 구성도 빈약했지만, 갓 구운 빵과 음료를 점심거리로 삼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때는 누군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플리트비체의 호수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친환경 전기 셔틀버스와 보트를 운행한다. 둘째 날 나는 셔틀을 타고 산 정상 부근의 스테이션 3에서 내려, 상층 호수군을 따라 잘 정비된 오솔길과 데크길을 걸으며 아래쪽 호수로 향했다. 각각의 호수에..

여기저기/풍광 2025.10.07

에피소드 7 - 플리트비체, 아바타의 배경

자그레브를 떠난 완행버스는 이름 모를 소도시로 들어섰다. 거리는 묘하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외벽의 페인트가 벗겨진 채 방치된 낡은 건물들이 풍기는 우중충한 기운에서 묘한 데자뷔가 일어났다. 내가 동유럽에서 경험한 여러 도시들의 어떤 변두리 풍경에서도 이런 기시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구글맵을 열어보니 이곳은 카를로바츠(Karlovac). 이름만 웅장한 ‘카를의 도시’에서의 첫인상은, 앞으로도 한동안 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버스는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터미널에 잠시 섰다. 내리는 이는 거의 없었고, 몇몇 승객만이 새로 올랐다. 운전기사가 바뀌었고, 검표원이 건성으로 표를 확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의외였던 건 최신형 메르세데스 버스였다는 점. '완행버스 = 낡은 차량'이라는 ..

여기저기/풍광 2025.09.29

에피소드 6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전진캠프

부다페스트가 내게 동유럽 여행의 베이스캠프라면,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여정을 위한 전진캠프다. 부다페스트 켈렌펠드 버스 터미널에서 반바지를 입은 일본 노인을 만났다. 나보다 두세 살은 많아 보였는데, 도쿄 출신이지만 지금은 파리에서 독신으로 살며 고양이는 이웃에게 맡기고 나왔다고 했다. 그는 출발 직전까지 모바일 티켓을 찾지 못해 허둥지둥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그는 겨우 탑승했으나 나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태평한 스타일이었다. 좌석이 떨어져 있어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 여행 중 맺은 인연은 여행이 끝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사진을 전송할 목적으로 한두 번의 이메일이나 메신저 교환이 있기는 하겠지만, 국적과 나이를 넘어 친분을 지속하기란 어렵다. 버스는 헝가리의 벌..

여기저기/풍광 2025.09.26

에피소드 5 - 부다페스트, 베이스캠프

동유럽 여행에서 부다페스트는 내 베이스캠프다.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의 이름을 딴 페렌츠 리스트 공항에서 시내 중심인 데악 페렌츠 광장까지는 공항버스로 약 40분. 헝가리의 물가는 2년 전보다 확연히 올랐다. 그때만 해도 1박 50유로 정도면 데악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깔끔한 중저가 호텔에 묵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당시 스쳐 지나치기만 했던 종군사진가 로버트 카파 센터를 이번엔 꼭 들르리라 했던 계획도 어긋나고 말았다.숙박비를 아끼려면 도심에서 벗어난 곳을 찾아야 하지만, 교통이 편리한 숙소를 고르기는 쉽지 않다. 2년 전 겔레르트 언덕을 혼자 올랐던 기억이 내게 쓸데없는 자신감을 주었던 걸까. 숙박앱에서의 위치와 사진 속 풍경만 믿고 부다 언덕 쪽 숙소를 선택..

여기저기/풍광 2025.09.22

에피소드 4 - 카타르 도하, 우회마저 다행스런

여행은 늘 설렘과 기대 속에 시작되지만, 그 그림자에는 언제나 불안이 따라붙는다. 이스라엘의 이라크 공습 여파는 도하에서 하루 스탑오버로는 바로 가라앉지 않았다.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는 출발지연과 경로우회를 거듭했다. 그러나 여행에서 두 시간의 지체쯤은 흔한 일. 문제는 중동의 긴장이 내 여정에 직접 스며든다는 사실이었다.2025년 6월 24일 자그레브.크로아티아 종단여행을 마치고 자그레브에서 들은 소식은 “이란이 카타르 미군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뉴스였다. 서울의 ‘여행감독관’(둘째 딸)은 이번에도 걱정을 쏟아냈고, 위험상황이라며 즉각 귀국을 지시했다. 그러나 몇 달을 준비한 여행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족들의 걱정은 당연하지만 연금생활자는 아껴 모은 여행경비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

여기저기/풍광 2025.09.13

에피소드 3 - 회항, 피할 수 없으니 즐겨라

여행길에는 늘 예기치 못한 변수가 찾아온다. 불안과 긴장감은 이번 여행길에서도 2년 전과 비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2025년 6월. 카타르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 아침에는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고 오후 2시가 되어야 첫 차가 다닌다. 금요일 이른 아침 도착 항공권이 저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상관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나 같은 노인 여행자에게 도하에서의 하루 스탑오버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시차를 서서히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급호텔에서의 호캉스도 반에 반값으로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다구간 항공권은 직항보다 보통 30% 이상 저렴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여행자라면 누구나 공항 택시 마피아를 경계한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도착하면 바가지를 쓸 확률은 더..

여기저기/풍광 2025.09.02

에피소드 2 - 검문, 독일과 동독 사이

프라하 플로렌츠 터미널을 출발한 플릭스버스는, 내가 깜박 조는 사이 보헤미아 중부 고원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잠시 후 클라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국경 검문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검문? 솅겐 지역에서는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의아해 구글을 찾아보니, 불법 이민자와 난민 유입을 우려한 독일 당국이 최근에 다시 검문을 강화했다는 설명이 나왔다.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대한민국의 여권 파워를 실감했던 내게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국경 검문소에서 경찰이 버스에 올라 모든 승객의 여권을 차례로 확인할 때도 긴장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 한쪽에선 웃음소리까지 흘러나왔다.---1982년, 마인츠에서 출발한 기차가 프랑크푸르트를 지나 동독 국경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여기저기/풍광 2025.08.27